도봉구 유흥업소 밀집지역에서 한글문화거리로 변신하다

| 안산휴게텔 판매자는 해례본의 값을 천원이라고 매겼지만, 간송은 귀한 물건은 제 값을 치러야 한다며 당시 집 열채 값인 만원을 지불하고 천 원은 판매자에게 수고비로 주었다고 한다.위의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간송은 일제가 수탈해 가는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는 것에 힘을 쏟았는데, 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하여 회화, 도자, 금속공예, 불교조각 등 수많은 문화재를 지켜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신윤복의 단오풍정, 미인도 역시 그의 소장품이다. 이처럼 전형필의 가옥은 한글문화의 중심지로써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수집하는 민족 문화유산의 수호자였던 간송의 얼과 혼이 서려 있다.

전형필 가옥에서 나와 북한산 둘레길을 따라 조금만 더 걷다 보면 세종대왕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와 사위 안맹담의 묘소를 만날 수 있다. 학문을 장려했던 세종대왕은 자녀들에게도 그 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글공부에 뛰어난 실력을 보인 정의공주는 세종대왕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특히 정의공주는 우리가 흔히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창제했다고 생각하는 훈민정음에 보이지 않는 큰 역할을 했는데, ‘죽산 안씨 대동보’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세종이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나, 변음과 토착(사투리)을 다 끝내지 못하여서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였으나 모두 풀지 못하였다. 드디어 공주에게 내려 보내자 공주는 곧 풀어 바쳤다.” 또한 우리말을 우리글로 쓰고 싶었던 세종대왕에게 한자를 이두로 표기하는 것의 불편함을 이야기해 한글 창제에 박차를 가하게 한 인물도 정의공주이다. 이처럼 정의공주의 묘에서는 그녀의 우리말글에 대한 사랑과 한글창제의 의지를 다시금 생각할 수 있다.


이번 주말에는 도봉구에서 빈민가에서 예술가의 공간으로 변화한 방학천을 만나고, 간송과 정의공주가 가진 우리문화에 대한 사랑을 함께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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